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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5회-개인전 평문-현동 화백, 다시 돌아와 원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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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88회 작성일 23-03-2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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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 화백, 다시 돌아와 원점에 서다


“화기인야畵其人也”, 널리 회자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60갑자 한 생을 돌아 이제 다시 원점에 선 현동 화백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한 마디로 그는 ‘쟁이’, 바로 ‘그림쟁이’였다. 한자 한 글자를 뽑아 표현한다면, 감히 ‘성誠’이라고 말하고 싶다. “생생불식生生不息”, 낳고 또 낳아 잠시도 쉼이 없음이다. 내 생각만이 아니라 화첩의 평어들을 읽어보니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몇 년 동안 매주 만나 동양 고전이며 화론畵論 등을 함께 읽고 토론했던 기억이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제 현동 화백은 그의 생도, 그의 그림 세계도 다시 원점에 섰다. 하나의 종결점이자, 또다른 시작점에 그는 섰다.     


‘화역畵易’, 현동 화백은 지금 화역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주역周易』을 그림으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주역』은 서양에서 The Book of Change, 곧 변화의 원리를 담고 있는 책 중의 으뜸 책이라고 풀고 있다. 매우 옳은 풀이다. 동양 고전 가운데 가장 많은 주석을 가지고 이는 책이 바로 『주역』과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이다. 이것은 이 두 책이 그만큼 삼라만상의 원리와 우주의 이치를 잘 온축하고 있다는 말이며,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가기를 원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세계에 다가가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다가가는 길도 다양했다. 『주역』의 경우, 이제까지 수많은 이들이 원리(義易)나 상(象易), 수(數易) 또는 점복(卜筮易) 등을 통해 다가가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효상爻象의 그림을 통해 『주역』의 세계로 다가가고 있다. 이것은 분명 새롭고도 의미심장한 지평을 열고 있는 것이다.


현동 화백은 이미 지난해 14회 개인전을 통해 화역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는 끊임없이 부수어왔다. 끊임없는 자기 부정, 자기 파괴의 연속이었다. 부수어야만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것을 그는 확신했기 때문이리라. ‘창조적 파괴’란 말이 이때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자기가 이룬 것을 자기 손으로 파괴하기란 결코 쉽지 않으며, 마음 편할 리 만무하다. 그래도 그는 이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뜨거운, 그리고 무서운 예술혼이 없고서야 누구나 함부로 감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동 화백은 특히 형形을 부수는 데 온힘을 쏟고 있다. 형의 세계는 색色의 세계이기도 하다. 형 너머의 세계는 상象의 세계이며, 상의 세계는 바로 형의 세계의 근원이다. 그림을 그리는 자는 형과 색을 통해 상에 다가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상의 세계는 형과 색을 통해 곧장 다가오는 것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형과 색에 매달려서는, 형과 색을 버리지 않고서는 상의 세계에 다가갈 수 없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그는 지금 무서운 예술혼으로 이 험난한 딜레마를 건너고자 하고 있다.


현동 화백은 지난번 개인전에서 ‘상외지상象外之象’을, 그런데 이번 15회 개인전은 ‘상중지상象中之象’을 내걸었다. 그래서 그런지 음양의 괘상卦象에다 이번에는 오행의 오방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괘상도 한곳에 조용히 눕거나 서 있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누웠다 일어서고, 펴졌다 꺾이고, 길었다 짧아진다. ‘기운생동氣韻生動’함이 더욱 느껴지고, ‘채움’과 ‘비움’의 조형감이 ‘자유자재自由自在’로와 보인다. 대작 중심의 전시는 작가로서 뭔가 많은 대화를 원하는 것 같고, 괘명만으로 화제畵題를 단 ‘불친절함’은 감상자에게 더 많은 몫을 돌리고자 하는 작가의 속 깊은 배려로 받아들여진다.


동년지우同年知友의 전시회 두 번째 평어를 쓰며, 깊은 축하의 마음과 함께 내 자신의 60년 삶을 한번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음에 감사드린다.


2017년 8월

북한산자락 이훤서창에서


계명대 교수 철학박사 홍원식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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