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3회-개인전 작가노트 -고금상조-
페이지 정보

본문
- 古今相照 -
작가의 작품은 내용과 형식으로 구분된다. 내용이란 작가의 내면에 감추어진 정신적 지향점으로서 ‘道’를 의미하는 것이며, 형식은 그 道를 담아내기 위한 ‘그릇(器)’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인화에 있어서 내용이란 우주자연의 理가 작가의 정신과 인격에 투사되는 것이며, 형식이란 그러한 정신, 곧 理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재료나 표현기법을 의미한다. 이 내용과 형식은 말로 표현할 때는 둘이지만 작품의 예술성으로서는 사실상 하나일 뿐이다. 형식과 내용이 각자의 온전한 모습을 다할 때 비로소 참된 예술성이 드러나게 된다. 아무리 작가의 고상한 정신세계가 있어도 그 생각을 담아낼 그릇이 없다면 작품으로써 예술성을 얻지 못하며, 비록 훌륭한 그릇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작가의 정신세계가 없다면 이 또한 예술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형식적으로는 둘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이다. 즉 전통을 익히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의 정신성을 체득함으로써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고, 현재를 익히는 것은 지금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그것을 어떻게 표현함으로써 작품 속에 구현해낼 수 있을지를 배우는 작업이다.
돌이켜보면 문인화를 시작한 후 벌써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처음 얼마간은 스스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예술장르를 넘나들었으며,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늘 지난 전시에서 발표했던 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전통적 표현기법을 숙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법을 통하여 시대정신에 맞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즉 전통 문인화에서 사용한 재료나 표현기법을 극복하고 현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창의적인 재료나 표현기법을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캔버스나 광목, 비단 혹은 천을 화선지 대신 사용하기도 하고, 먹 대신에 아크릴물감이나 유화물감, 또는 기름이나 흙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후 철학에 대한 공부가 깊어지면서 재료나 표현기법에 관한 실험적인 노력이 문인화의 예술성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없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 담긴 정신과 내용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의 작업은 다시 화선지와 먹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십 년 동안 발표한 작품들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천착하여 작품전을 준비하였다. 이런 점에서 2000년 이후에 열었던 작품전은 먼저 전시회에 대한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를 어떻게 작품을 통하여 드러낼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강산이 다시 변하자 어느 순간 그 동안의 공부과정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을 이번 전시회에서 ‘古今相照’란 주제를 통하여 드러내고자 한다. 즉 2000년 이전에 작품을 통해 실험했던 재료나 표현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2000년 이후에 고민했던 문인화의 정신성에 관한 내용을 현대의 시대정신에 맞게 표현하고자 한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느림이 아닌 빠름이며, 흑백이 아닌 칼라, 막힘이 아닌 소통, 어둠이 아닌 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모두를 표현기법을 통해 드러낼 수는 없을지라도 우선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다. 따라서 화선지 대신에 기름종이를, 광목이나 천 대신에 알루미늄 판을 사용하였다, 이는 빠름을 의미하는 가벼움과 빛을 작품 속에 적용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면서도 문인화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정신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림의 화목이나 표현기법은 전통적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비록 처음 마음먹었던 것을 그대로 다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앞으로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어가고자 한다.
2013년 5월 명제헌明齊軒에서
- 이전글2016년 14회_개인전 작가노트 23.03.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